내가 찾던 뮤즈에 대한 이야기
‘어려서부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유는 너무 진부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다른 말을 지어낼 수도 없네요. 그림 그리기를 가장 좋아했어요. 학습하는 모든 것을 그림과 연결해 생각하곤 했죠.
<언더테일>이라는 게임의 주인공을 약 5년간 그렸던 적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거의 모든 시간을 그 게임에 대해 생각하며 보낸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게임에서 나타나는 시간선에 대한 메타적 언급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어떤 영원, 끝나지 않는 시간, 그 속에서 잊혀지는 존재들과 그럼에도 기억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었어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고 강하게 다짐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작가란 자신이 그린 창작 그림으로 수익을 얻는 사람이에요. 작년 말에는 용돈을 벌 겸, 그림 연습도 할 겸 해서 커미션을 시작했고 현재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신청자의 요청에 맞춰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작품을 전달하며 수익을 얻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겁을 준 것보다 그리고 제 생각보다 훨씬 도전 해 볼 만한 즐거운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림으로 돈을 벌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의를 확장해서 창작 그림을 꾸준히 그리는 사람도 작가라고 한다면, 위에서 말씀드린 ‘언더테일’ 게임 팬아트를 그리고 있던 시절이었을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게임 캐릭터에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활동해왔습니다.
[Have you smiled today?]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제 그림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한 그림이에요. 제가 가장 애정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업 과정은 즉흥적이었고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작년의 저는 흐트러진 연필 선과 종이 위에 칠한 듯한 색상 표현에 주목했다면, 올해의 작업에는 라인이 있는 것과 라인 없이 허물어진 형태의 대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층을 구분해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또한, 사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형태의 흐름이 명확하고 뚜렷한 구도를 설정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작업 중에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 순간 떠오르는 기분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한동안 저는 글리치 효과가 섞인 IDM (Intelligent Dance Music)과 포크트로니카의 경계에 선 듯한 음악에 완전히 매료된 적이 있었습니다. 경쾌한 척을 하는 신디사이저 사운드와 글리치의 조합은 다른 전자 음악 장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강한 서정성을 더해 주었습니다. 이런 음악을 들으며 느꼈던 감상을 언젠가 화폭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그려지게 되었네요.
작품의 전체적인 테마이자 제목인 <Have you smiled today?>는 제가 당시 매우 좋아했던 Eriko Toyoda의 포크트로니카 앨범에서 따왔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즈음 해당 앨범을 즐겨 들었어요. 미니멀한 멜로디와 나른한 흐름 속에서 파찰하는 소리가 어딘가 반짝인다고 느껴져서 별이 빛나는 듯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메인 오브제로 사용된 식물은 열대 서양란의 일종인 Oncidium cirrhosum (Lindl.) Beer 입니다. 이 꽃의 꽃잎이 별 모양을 닮아 있어서 이번 그림에 그리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주목해온 것들이 보통 창작의 소재가 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식물학을 전공했다 보니, 그림을 그릴 때도 자연스럽게 식물과 자주 연결 지어 그리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추구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정제된 형태에서 벗어나게 그리려는 지향성과 마치 멋대로 자라는 식물에서 서로 파장을 맞추는 것이에요. 그래서 식물들을 소재로 삼는 것을 좋아합니다. 요즘에는 특히, 식물 중에서도 조금 시들거나 웃자라거나 학술적 가치는 없지만, 어딘가 귀여워 보이는 식물들의 모습을 많이 기록하려고 해요.
하지만 창작 주제를 오직 식물에만 한정하고 싶지는 않네요. 여러 메시지와 오브제가 혼합되어 모호한 의미를 가진 그림들을 좋아해서요. 이런 그림을 그리고자 최근에는 일상의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꼬아 글을 쓰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들을 바탕으로 그림을 만드는 거죠. 올 초에 완성된 <4월의 여름> 시리즈가 바로 그 예입니다.
보통, 저는 쌓아둔 소재들 중에서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 그리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제 노트에 낙서하듯 기록해 둡니다. 이 아이디어들을 메모한 그대로 구현하기에는 어려울 때가 많아서 보통 2-3개의 아이디어를 조합해 그립니다.
작가가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고 싶은 말을 여러 이유로 하지 못해왔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기록해두면, 결국에는 그 내용을 꼭 그림으로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中
시인, 이제니
하브 작가님에게 힘이 된 문구
아무래도 생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닐까요? 이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은 극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아마도 평생 삶의 밑바닥에서 숨 쉬며, 힘이 들 때마다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합니다. 만약 0에서 1이 되기를 원한다면, 0으로 돌아갈 때마다 절망하겠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소수점 사이를 오가며 상태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때로는 단순히 호흡을 유지하는 것에 의미를 두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괜찮은 대안이 되었습니다.
10년 전이면 중학생 시절이었네요! 그때의 일기장을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그 시절에 어떤 기록을 했을지 종종 궁금할 때가 있거든요. 당시에는 제 생각이 매우 확고했기 때문에, 미래의 저의 조언을 들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 시절의 저는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2021년에는 단체전 전시에서 유물론적인 사고의 긍정에 대해서 다루었고, 2023년 개인 작업에서는 모서리가 마모된 물건과 마음에 대한 애정을 주제로 다뤘습니다. 올해 개인작을 작업하면서는 잊고 잊혀지는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네요. 이처럼 저는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 그 당시의 생각들을 그림에 담아왔습니다.
30대의 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을까요? 인간으로서 저는 보고 듣는 것에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한때 그러한 제약이 싫었던 적도 있었지만, 삶의 한계가 각자의 이야기를 독특하게 만든다고 깨닫고 나서는 상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살아 숨 쉬는 한,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해가 뜨기 직전이나 진 직후의 코발트블루 하늘을 좋아합니다. 또한, 손이 많이 닿아 모서리가 둥글어진 사물들, 하루를 마치고 누웠을 때 이불에 스치는 맨발의 감각, 조금 시들어 갈빛이 도는 꽃받침, 그리고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껴안는 포옹 같은 것들을 좋아합니다. 포옹이라니, 지금 생각하니 포옹 소리가 나야 할 것만 같은 귀여운 단어네요. 이러한 잡다한 것들을 주체 없이 좋아하는 성격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것들을 좋아하며, 그것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려 나가지 않을까요?
사진 : 하브 작가님 제공
인터뷰어 : JOY